내 나이는 34살
나이가 34살이다. 벌써 5월 10일.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혼란스럽기도 하고, 별생각없기도 하다. 치열하게 살아야하는 것이 맞는 것 같으면서도, 오늘을 즐기는 것도 맞는 것 아닐까?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하는 것도 맞지만, 사회라는 곳에서 나 혼자만 살 수도 없는 것이고. 주말에 푹 쉬고 놀고 싶으면서도, 뒤쳐지는 것은 원하지않고, 여행도 가고 싶은데, 돈을 헛되이 쓰는 것 같기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삶을 접하며 세상의 부조리도 경험하다보면 옳고 그름에 대해 우리가 정의할 수 있는지? 혹은 그런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무겁기도 하다. 언젠가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텐데, 무엇을 남기기 위하여 아둥바둥 사는가? 그렇다고 해서 돈만을 추구하는 것은 또 무엇을 위함인가? 살아남기 위해 악을 행하는 것을 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을 무릅쓰고, 의미와 의지를 지키는 것은 멋진 것인가? 그렇다면 그 반대는? 나의 의미와 의지가 누군가에겐 처절한 현실일 수 있는 것인가? 수 많은 가치의 충돌 속에서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은 너무 어렵다. 물처럼 흩날리듯, 적응하며 살아갈 것인가? 바람과 물에 산산히 부서지는 바위처럼 살아갈 것인가?

자기다움
사람이 많이 모일 수록, 가치의 충돌은 강력해진다. 자기다움을 내려놓는 사람들은 빠르게 적응하고, 자신을 꼭 쥐는 사람들은 튕겨져나간다. 혹은 너무 강력하게 자기다움을 쥐다보면, 주변사람들이 다 튕겨져나간다. 그러면 자기다움을 내려놓는 사람들만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곤 말을 하겠지. 우리 조직은 다들, 생각없이 살고 있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다. 지금의 상황은 다 나에게 있다. 나의 선택이고 내가 버틴 길이고, 내가 버티기로 결정한것이고, 내가 무시한 모든 것들이 한데 모여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지금의 나는 자기다움을 많이 내려놓았다. 정치라고 해석을 해야하는 것인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몇명 정도 있어보이긴 하는데, 그냥 물같이 살고 있다. 어쩌면, 나의 유도리있고, 유한 성격의 끝판이라고 볼 수 있는 걸까? 나를 버리고 나니, 아이러니하게 나다움 모습이 다시금 들어난다. 그런데, 올바른 상황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침몰하는 배안에서, 내 방이 특실이라고 해서, 올바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침몰하는 배에서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위치과 역할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쟁취해야하는가? 방관해야하는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생존
나라는 인격체라는 것에 앞서 나도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한다. 어쩌면 내가 한끼 식사로 하는 소나 돼지 그리고 닭과 다를바 없는 존재일 수 있다. 그저 우연히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거에 대해서, 소가 아닌 소고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어쩌면 생명체라는 것도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어쨋든 사고를 할 수 있는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생존을 추구해야하는 것은 필연적일 것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기위하여,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더 살게만들기 위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생존이라는 목표앞에 나의 모든 행동과 사고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생존이란 치열한 것이다.

성장
나의 역할을 넘어, 외부적인 시스템의 힘과 구조로, 나의 생존이 보장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저 끝인가? 살아있음 그 자체로서, 나의 존재는 끝인가? 그저 고기가 되지않음으로서, 만족해야하는 것인가? 그저 그 이상을 추가하게 되어있다. 어제보다 단 0.1이라도 나아지는 무엇인가를 기대하면, 살아간다. 기대감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고통을 견뎌나갈 수 있다. 생존은 고통의 연속이다. 살아있음이 보상이 아닌, 기본이 된다면, 이젠 고통을 정당화할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마치, 이건 도박과도 같도,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감 어쩌면 헛된 기대감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것이든 그저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는 어떤 기대감.
성숙
그리고 어느순간 느낀다. 세상에는 방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쓰레기는 아무리 모아도 쓰레기이고, 100개의 지식보다, 1개의 경험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때까 있다는 것을, 시점과 상황에 따라 같은 것이 다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상호작용을 하기도 하고, 세상과 나의 연관성을 찾기 시작한다. 안타깝치만, 세상은 내가 없이도 잘 돌아간다. 그냥 그런 것이다. 내가 아무리 멋지고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그냥 잘 돌아간다. 미국의 트럼프와 일론머스크가 없더라도 잘 돌아간다 세상은, 나도 그렇다. 대한민국에 이순신장군님과 세종대왕이 없었다고, 많은 것이 변했을까? 많은 것은 변했겠지만, 세상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돌아간다. 그저 세상의 구성과 형식이 달라졌을 뿐, 나의 영향력은 커졌을 지언정, 세상이 너무나도 거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나의 존재가 세상의 부품, 어쩌면 기능이 아닌 부품일 수도 있다는 미약함을 느끼게 된다. 그저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에 대한, 합리화일 뿐. 개인이 세상을 바뀔 수 있을 지언정, 개인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세상을 너무 가벼운 것으로 보는 사람일 뿐, 고작 지구라는 작은 단위에서 나의 존재.

순환
어쨋든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않든, 세상에 태어났다. 호르몬이 시키는 대로, 본능이 시키는대로 혹은 거부하는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죽음을 향한 레이스는 절대 멈출 수 없다. 어떻게 죽을지에 대한 선택 또한 우리는 할 수 없다. 그저 우리는 세상에 정해놓은 규칙에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선택만 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살아왔더라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 자부할 수 있었을까? 당장의 30년을 되돌아봐도, 아쉬운 점들이 분명히 보이는 것을, 하지만, 지금 단 하나의 만족스러운 것이 있다면 후회하지말자, 세상은 수학과도 같고, 카오스같다. 나의 짧은 변화가 결과를 말도안되게 바꿀 수 있다. 삶은 카오스와도 같아서, 작은 시작점의 변화가 전혀다른 삶을 바꾼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커피 한잔을 하며, 오알렛을 쓰고있는 것도, 나의 과거의 모든 순간들이 모여서 결정되었을 것. 앞으로 나가올 새로운 미래를 향하는 것이다.
글의 끝에서,
의미에 대해서, 의미란 찾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그 어떤 사람도 나의 삶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하지않는다. 내 삶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람이다. 오직 '나 자신'이다. 나 스스로 자기다움을 내려놓든, 강화시키든, 혼란스럽든 울며 지치든,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다. 외부상황들은 나의 선택의 폭을 좁혀주고 넓혀줄 수 있지만, 결국은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다. 극도로 부조리해보이지만,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다. 내가 생존해있고, 성장해왔고, 지금의 성숙함은 모두 나의 선택이다. 단 한 순간도 우리는 생존과 성장 그리고 성숙의 순간을 남이 해준 적은 없다. 남들이 결정해준 삶을 살아간것도 결국은 나 자신이다. 그래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한다. 의미를 부여한 삶은 속도와 풍성함이 붙는다. 그리고 나와 같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찾고 싶다. 나는 이를 가치공동체라고 생각한다.